[Dining Story] 우리의 소울 푸드, 김밥의 모든 것, 김밥 재료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2022.05.20 09:00:01

✽본 지면은 한국음식평론가협회와 함께합니다.

 

1994년 런던, 김밥의 가치를 처음 인지하다


1994년, 필자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 하나 만을 가지고 세계무전여행을 떠났다. 그 시작지인 런던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우연히 기웃거렸던 일식레스토랑에 취업하면서 당시 스시로 인식돼 존재가치 조차 논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 김밥의 존재감에 큰 충격을 받아 김밥의 체계를 구축할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독일 베를린 팔켄제의 한 주택에서 ‘김밥 세계화’의 비전을 결정하고 김밥의 체계화를 구축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 뒤, 2015년 사재를 털어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타워팰리스 인근 단독건물을 임대, 세계 최초로 김밥 전문 교육기관인 ’락셰프의 쿠킹클래스’를 설립하며 김밥 세계화의 행보를 시작했다.

 

글로벌 슈퍼푸드로 성장한 대한민국 김밥


BTS 김이 아미들에 의해 미국, 일본, 영국, 호주,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에서 나오자마자 품절이 날 정도로 판매되고 있다. 조미김을 넘은 김과자의 형태로도 전 세계에 새로운 시장을 창출, 수출에 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태국은 한국산 김의 큰 수입국이 돼 자국 브랜드로 김스낵을 만들고 전 세계로 역수출 하는 등 김은 K-푸드의 첨병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김이 블랙푸드로서 건강식품으로 주목 받고 있으며 더불어 김밥은 대표적인 건강 한식으로서 그 위상을 높이고 있어 태운 종이를 먹는다는 이상한 식품 취급을 받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슈퍼 블랙푸드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또한 21세기 식품산업의 검은 반도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한민국 수출의 효자종목이자 글로벌 식문화 트렌드가 됐다.

 

 

소비 트렌드에 맞춰 성장하고 있는 김밥시장


즉석섭취식품은 동·식물성 원료를 식품이나 식품첨가물을 가해 제조·가공한 것을 나타내는데, 대표적인 즉석식품에는 가열, 조리과정 없이 그대로 섭취할 수 있는 도시락, 햄버거, 김밥, 선식 등이 있다. 맞벌이 가구 및 1인 가구 증가, 현대 생활의 분주화, 높은 물가 상승률에 따른 간단한 식사를 원하는 소비층이 증가함에 따라 김밥은 즉석식품으로서 그 시장은 계속 증가 추세며 국민들의 아침 결식률을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최근 건강에 대한 관심 등의 증가와 외식, 간소한 식사를 선호하는 식문화 형태의 변화 등으로 김밥은 구입하기 쉬우면서도 짧은 시간에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슬로우 푸드로 각광받고 있다. 간편한 즉석식품으로서도 짧은 식사 시간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소비층이 점점 증가하면서 그 가치 또한 더욱 높아지고 있다.

 

기본재료조차 영양학적 
가치가 높은 대한민국의 김밥


김밥의 형태를 고정시켜주는 주재료인 해조류 김은 붉은 빛을 띠는 홍조식물로 한번 구워 내면 그 특유의 향과 맛이 좋고 영양가도 탁월하게 높아진다. 
한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연인 밥을 담당하는 쌀은 단위 중량당 열량이 높아 인구부양 능력과 에너지원의 탄수화물로서 가장 훌륭한 곡물이다. ‘한국인의 밥심은 쌀밥심’이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김밥 맛의 강한 핵심을 잡아주는 단짠의 단무지는 특유의 노란 색상으로 김밥 단면의 색도 함께 맞춰주는 이중적인 효과를 담당한다. 항상 그 자체를 먹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음식이든 붉은색으로 색의 조화로움에 큰 핵심을 담당하며 맛을 떠나 특유의 식감을 담당하는 홍당무는 비타민 A의 보고(寶庫)로도 유명한 건강 채소다. 당근의 애칭인 홍당무에서 ‘당’은 엿 당(糖)이 아니라 당나라 당(唐)을 가리키며 이는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에서 당(唐) 자가 중국을 가리키는 접두사처럼 쓰였기 때문에 ‘당근’은 ‘중국에서 건너온 뿌리채소’, ‘홍당무’는 ‘중국에서 들어온 붉은 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이하게도 겨울이 제철인 채소로, 겨울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자란 것을 최고로치는 시금치는 겨우내 스스로 얼지 않기 위해 강한 힘을 발휘, 잎사귀의 당도를 올린다. 인위적인 단맛이 아닌 자연적 단맛은 김밥재료 중 단연 우위일 정도로 자체 강한 단맛과 건강한 녹색을 내뿜으며 시금치는 다양한 비타민도 함유하고 있는데 특히 비타민 A가 가장 많은 채소다. 


‘아주 침착하며 태연한’, ‘매우 냉정하며 태연한’이란 뜻의 ‘Cool as a Cucumber’라는 영어 숙어가 있을 정도로 내부 온도를 외부 기온보다 훨씬 차가운 상태로 유지하는 오이는 늦봄부터 여름까지가 제철이며, 김밥의 녹색과 아삭하고 향긋한 시원함을 더 해주는 역할을 한다. 


계란은 고소한 맛과 김밥에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 그리고 맛깔스러운 샛노란 색감으로 눈을 즐겁게 하는 재료다. 2016년을 기준으로 1인당 연간 약 268개(11~12kg)를 소비할 정도로 가장 범용적인 재료인 계란은 거의 모든 아미노산을 가지고 있어 완전식품으로 평가받는 가장 완벽한 기초 단백질 음식이다. 수분 75%, 지방 11%, 단백질 11%, 탄수화물 1% 내외며 알부민을 포함해 피로 회복 및 세포 생성에 큰 도움을 준다. 과거에는 생식해 강장제로 이용했는데 주로 서양에서는 칵테일의 재료로 이용했고 쌍화탕에 넣어 보신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달걀은 순우리말이며 계란은 한자어다.


다음은 김치 크로니클의 진행자인 장-조지 부부가 한국 요리에 참기름을 거의 국물 수준으로 때려부어 먹기도 했던 김밥의 강렬하며 자극적인 향을 담당하는 참기름이 있다. 참깨 특유의 독특하고 고소한 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식에 소량 첨가하면 고소한 맛과 향이 밴다. 한국에서는 주로 국, 찌개, 나물, 비빔밥 등 각종 음식에 넣어서 입맛을 돋우는 데 쓴다. 하지만 소량으로도 음식의 맛을 완전히 바꿔버릴 만큼 존재감이 남다른 식재료라 다른 재료 특성을 살리고 싶은 경우에는 적당히 사용해야하는 반면 김밥에는 참기름이 빠지면 절대 안될 정도로 그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미용 용도로 많이 쓰이는 추세며, 피부에 바르거나 마사지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외국에선 참기름에도 ‘엑스트라 버진’이 존재한다.

 

그 옛날 더욱 귀한 대접을 받았던 존재, 김


존재감에 비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김밥의 김은 한자로 ‘金’이라고 표현되며 ‘김’의 이름만 봐도 밥상에서 차지하는 우리 김의 위상은 중국, 일본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옛 문헌의 기록을 보더라도 김이 얼마나 상류층 입맛을 사로잡는 아주 귀한 고급식품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고려 말 재상을 지낸 목은 “이 색은 하얀 밥그릇에 푸른 김이 놓였으니 밥상에 꽃이 핀 듯하고 입안에는 향기가 감돈다.”고 노래했다고 하며, 조선왕조실록에는 김은 왕실에 보내는 공물이었으니 임금도 김으로 밥을 싸서 수라를 들었을 것이며, 태초에 바다 마을 주민이 배고픔을 면하려고 허리에 새끼줄 매고 따왔던 바다 이끼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재상의 밥상과 임금 수라상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한반도에서 시작된 세계 최초의 쌀농사


1972년에 한국은행에서 발행된 5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벼이삭을 기억할 것이다. 쌀은 6500년 전 전 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재배됐고, 4000~5000년 전 인도 갠지스 강 유역을 거처 중국 남부지역에서 시작됐으며, 한반도에는 쿠릴해류를 타고 이주해온 동남아인에 의해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후 대략 9000년 전 중국과 인도 야생 벼의 근접관계성이 컴퓨터 알고리즘 분자시계기법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1994년 충청북도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 유적에서 볍씨 11톨이 출토됐는데 방사선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1만 3000~1만 6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2016년 국제고고학회에서 벼농사의 기원을 한국으로 규정했으며, 세계적 고고학교과서로 사용하는 ‘고고학개론서’에서도 쌀의 한반도 기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었다. 벼이삭을 도안해 논벼농사의 기원지가 한국임을 기념한 50원짜리 작은 동전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세계 최초의 쌀농사가 한반도에서, 그것도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지를 가져도 좋다. 참고로 동남아인 이주설에 따르면, 밭벼농사는 우리나라에 BC 3500년경, 일본은 BC 1200년경에 전해졌다고 한다.

 

김과 유사한 제조방법을 가진 종이의 역사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돼


일본에 종이가 전해진 것 또한 한국의 삼국이 불교문명을 전하면서부터였고, 일본은 이를 통해 왕실에서 직접 불경을 종이에 필사, 보급하면서 중앙집권통치국가를 수립했다. 이는 여러 부족의 목소리가 높은 분열된 나라에서 통일된 일본으로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오늘날 세계 일류의 선진국이 되는데도 종이가 그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옛날 한중일 삼국의 문명 전파가 불교의 전파를 통해 중국, 한국, 일본으로 많이 전해졌던 것처럼, 2세기 중국 한나라의 채륜이 발명한 종이는 우리나라로 전해진 후 고구려에서 니시지마, 신라에서 에치젠, 백제 오사카 총 루트를 통해 일본에 전해졌다. 한반도에서는 중국보다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제지술이 있었기에 이의 역사적 기반으로 비춰볼 때 유사한 김의 제조 기술 또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됐을 것으로 여러 역사적 자료에 기반해 추측할 수 있다.

 

훨씬 앞선 김과 융복합된 종이 제조기술에서 유추할 수 있는 
한국의 김제조 기술


우리가 현재 먹고 있는 종이형태의 얇은 김은 먼 옛날부터 있지는 않았다. SEAWEED라 불리며 수많은 해초 중의 하나인 이 검은 바다 이끼로 종이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대혁신적인 사고와 융합적인 기술의 변화가 필요했기에 종이 김을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문헌에 16세기 초, 중종 무렵 김을 섞어서 만드는 종이가 있었다. ‘태지(苔紙)’라는 한지 중 하나인데 글씨가 잘 써지고 특히 강도 높고 질겨 당시 최고급 종이였다고 한다. 이런 기록에서 볼 때 김의 제조기술은 그보다 전에 개발됐었을 수도 있고 단순한 종이 김은 그보다 더 일찍 탄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다. 김발 같은 고운 틀에 곱게 분쇄한 원료를 올려 얇게 뜨는 종이 제조 기술은 김을 만드는 기술과 아주 흡사하다는 관점과 제조 기술적인 면에서 김의 제조 방법에 큰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문헌에서 검증된 월등히 앞선 대한민국 김의 역사


김밥이 한국 고유의 음식이라는 주장은 김의 역사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1985년  발간된 일본 오후사 쓰요시 박사가 저술한 <바다채소>라는 책에서 일본은 에도시대(도쿠가와 시대) 교호 초기부터 김을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초중반에야 김을 채취하거나 양식해 김을 이용한 식품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 김이 문헌상으로 처음 등장한 최초의 사료는 1281년 고려 충렬왕 때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로 신라시대부터 ‘김’을 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424년에 경남 감사 하연이 편찬한 지리책인 ‘경상도지리지’에도 김 양식의 기원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하동지역의 전래에 의하면 약 260년 전 한 할머니가 섬진강 하구에서 패류를 채취하던 중 김이 많이 착생한 나무토막이 떠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붙어 있는 김을 뜯어 먹은 후 맛이 매우 좋았다. 이 후 죽목을 수중에 세워 인공적으로 김을 착생시킨 데서 비롯됐다.”라고 쓰여 있다. 


1429년 세종실록에는 조선시대 명나라에 보낼 진상품 중 하나로 해의(김)가 기록돼있으며, 1481년 완성된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남도 광양군 태인도의 토산물로 채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578년에는 중국 명나라의 남경에서 완성돼 1596년(만력 23년) 이시진에 의해 편찬된 약초학의 연구서이자 박물사전인 ‘본초강목’을 보면 “신라의 깊은 바다 속에서 채취하는데, 허리에 새끼줄을 묶고 깊은 바다 속에 들어가 따온다. 4월 이후로는 대어가 나타나 해치기에 채취할 수가 없다.”라고 김에 대해 전하고 있다.


1650년경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경세유포’라는 고서에서 광양에서도 김을 채취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말인 조선 말기 편찬된 요리책, ‘시의전서’에는 김밥과 유사한 김쌈에 대해 “김을 손으로 문질러 잡티를 뜯는다. 손질한 김을 소반 위에 펴 놓고, 꿩 깃털로 기름을 발라 소금을 솔솔 뿌려 재운 후 굽는다. 네모반듯하게 잘라 담고 복판에 꼬지를 꽂는다.”라고 조리법이 기록돼 있다.


1924년의 ‘조선지수산 제2호 하동 해태양식 연혁의 기록’에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관찰사가 이곳을 순시할 때 태인도 동쪽의 갈도 사람들이 관찰사 수행원으로부터 그 양식 및 제조방법을 전수 받았다고 전한다.”고 돼있다.


이와 같은 한일 간 존재하는 다양한 역사적 기록을 비춰볼 때 김이 일본에서 시작됐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으니 김이 한국이 원조라는 데 강한 긍지를 가져도 될 듯하다.

 

 

세계 최초로 대량의 김 양식을 성공한 김해김씨 김여익 선생


“김을 처음 양식했고, 또 김 양식법을 창안했다.”라는 사실은 조선시대 ‘해은’ 김익경(金益卿)의 김해김씨 사군파(四君派), 감무공파(監務公派)의 항렬인 26세손 김여익(1606~1660) 선생의 전남 광양에 위치한 김시식지에 있는 묘표(전라남도기념물113호)에 적힌 ‘시식해의’(始殖海衣)와 ‘우발해의’(又發海衣)에서 알 수 있다. 즉 이때 세계 최초 대량의 김 양식이 있었다.


1650년경 전남 영암군 서호면 몽해에서 태어나 병자호란으로 청과 굴욕적 화의에 분개해 광양 태인도로 이주, 은둔한 김여익은 실사구시 정신이 투철했던 인물이다. 태인도에서 김 양식을 처음 시작하기 전에는 자연산 돌김뿐이었는데 섬 갯가에 밀려온 대나무에 김이 붙어 자라있는 것을 보고 소나무와 밤나무 가지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양식법을 고안, 김 양식을 시작했다. 조선 16대 인조(仁祖)는 수라상에 새까맣고 종이 같은 반찬 김을 보고 맛이 너무 좋아서 이름이 뭔지 묻자 아는 사람이 없어 한 신하가 “광양 땅에 사는 김 아무개가 만든 음식입니다.”라고 고하자 임금이 그 자리에서 그럼 앞으로 이 ‘바다풀’을 그 사람의 성을 따서 ‘김’이라고 부르게 한 것이 ‘김’의 어원이라고 한다. 

 

조상 대대로 김과 유사한 형태로 즐겨온 쌈문화


이러한 역사적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주 오래 전부터 김은 존재해왔고 게다가 우리에겐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고유 식문화인 ‘쌈’ 문화가 있다. 따라서 김을 밥에 싸먹는 문화가 자연스레 존재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복을 싸서 먹는다’라는 의미의 복쌈은 정월대보름에 복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먹는 별식이었다. 


1285년 삼국유사(고려 충렬왕 11년) 기록에 복쌈(복리)이라 해 대보름날에 취나물이나 배추잎, 그리고 김에 밥을 얹어 쌈을 싸서 먹는 것은 신라시대부터 시작했다고 기록돼 있다. 1819년  간된 ‘열양세시기’와 1849년의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배춧잎에 김과 밥을 싸먹는 음식이 ‘복과’, ‘박점’, ‘복쌈’이라는 음식으로 존재했다고 나와 있다.


시골에서는 옛날에 노적쌈을 많이 쌓아야 그해 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었는데, 김에 싼 복쌈을 많이 먹으면 볏섬을 많이 한다고 해서 “볏섬을 많이 먹었으니 올해 농사는 내가 최고”라고 자랑을 했을 정도였다. 특히 이때 칼이나 가위로 자르면 벼 목을 잘라 농사를 망친다고 해 김은 손으로 대강 잘라 먹어야만 했다고 한다. 전북 고창에서는 오곡밥을 지어 성주 앞이나 장독대에 오곡밥을 김에 싸서 올리는 ‘노적쌓기’라는 풍습도 있다.
<바다채소>에서는 18세기 초중반 이후부터 김을 음식으로 활용했다고 나와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김을 먹었고, 보편적으로 김을 활용한 조선시대의 사실적 기록을 기반으로 판단해 볼 때 우리나라가 훨씬 앞설 수밖에 없었다는 자연스러운 추론이 과연 필자만 가능한 것일까라는 관점에서 우리들은 김밥에 대한 일본 기원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초기 형태의 우리의 김밥이 조선시대쯤에 일본으로 전해진 후, 일제시대에 새로운 형태로 우리나라에 역수입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김밥의 일본 유래설은 명확한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논리상으로도 상당히 무리가 있다.


*다음 호에서는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김밥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김락훈 (주)락셰프 대표

현재 대한민국김밥포럼 의장, 대한민국김밥 홍보대사와 전라남도 고흥군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