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실고실한 흰 쌀밥 위에 새콤달콤한 오이장아찌 한 점을 올린 식사. 이 비슷한 도시락을 먹은 경험, 누구든 한 번쯤 있지 않을까. 일본에서 오이장아찌는 ‘나라스케’라 불린다. 나라는 나라현의 지역을 말하며 스케는 장아찌라는 말이다. 나라스케와 사케로 유명한 도가가 있다. 나라현의 이나타 사케도가다.
나라스케의 원료는 오이, 흰 참외, 수박, 무, 생강 등의 야채다. 새콤달콤한 맛의 비결은 사케를 만들고 난 술지게미를 이 재료들을 넣은 용기 바닥에 깔고, 재료의 중간 중간에도 꼼꼼하게 깔아 숙성시킨 데서 나온다. 나라스케를 꿀맛처럼 먹었던 기분, 정녕 나라스케 안 사케 성분에 속았던 것일까? 최근 일본에서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다. 일본은 음주운전 처벌이 매우 엄한 나라다. 한 음주 운전자가 경찰에게 적발됐는데 그는 “사케를 마신 것이 아니라 ‘나라스케’를 많이 먹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경찰은 판단이 어려웠다. 술지게미 속에 나라스케를 오랫동안 담가 숙성시키기 때문에 나라스케를 많이 먹고 운전을 하면 음주운전으로 오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알코올건강의학협회가 나서 교통사고 종합 분석센터에 의뢰해 성분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나라스케 50g(약 8조각)을 먹은 후 20분이 지나 운전해도 알코올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운전자는 더이상 ‘나라스케’를 먹었다는 핑계를 댈 수 없었다고 한다.
나라스케는 무려 1300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옛 왕궁 유적지에서 장아찌 납품 전표 등이 발굴된 자료를 보면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나라스케’가 상류층의 ‘보존식’이었다고 한다. 왜 나라스케가 나라 지역에서 만들어졌을까? 일본 사케의 역사를 보면 원래 사원에서는 술을 빚지 못하다가 무로마치(室町)시대에 불교가 번성해 사원이 늘 어났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서 승려가 쌀로 술을 만들어 제단에 올리는 문화가 생겨났다. 그 사원이 바로 나라현에 있는 쇼레키지(正暦寺)다. 이 사원에서 사케 제조법, 누룩과 초기 발효균을 만드는 법, 술 부패를 막는 열처리 등 주조 기술을 발명했다. 이 기술은 무로마치 시대 문화를 대표한다. 일본 고문서인 [고슈니싯기], 에도시대 초기의 [도가슈조기]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나라현이 일본 술과 장아찌의 발상지가 된 연유다.
나라현은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삼국시대 백제로부터 문화가 많이 전수됐고 ‘나라’라는 이름은 한국어의 나라(国)와 음과 뜻이 같다. 주대한민국 오사카총영사관에서 매년 개천절 기념식을 개최할 때면 주변 지역 현 지사와 시장들이 참석해 축사를 한다. 이 때 나라현의 아라이(新井)지사는 한국어로 꽤 긴 문장의 축하 메시지를 전할 정도다.
이처럼 유서 깊은 나라 지역에 사케도가인 이나타주조(稲田酒造)가 있다. 그 역사는 130년이라고 한다. 천리교로 유명한 나라현 천리시(天理市)에 있고 소규모의 도가지만 알차다. 젊은 기술 장인의 쌀 다루는 방식이 독특하다. 선미(쌀을 씻는 과정)를 위해서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온 MJP기계를 사용하고 있다.
쌀을 제트 기포로 씻어 흙이나 미세오물을 배출시키고 그 기류(風流)로 빠르게 수분을 증발시키면 쌀이 깨지지 않는다. 또한 원심 탈수기를 30년 전부터 사용하는데 선미 도중 필요 이상의 수분 흡수를 막아 수증기로 밥을 찔 때 최적의 상태가 된다. 완성된 사케를 짤 때 보통 다른 사케도가는 시간을 절약하고 대량생산을 위해 한꺼번에 눌러 짜는 방법을 쓰지만 이나타의 젊은 장인은 작은 무명 자루에 넣어 밤새도록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게 하는 후쿠로시보리(袋しぼり) 방법을 쓴다. 술도가를 대표하는 팜플렛의 첫 장에 나라스케의 사진이 나올 만큼 이나타 주조는 나라 스케로도 유명세를 날린다. 고급 사케의 향이 배어 있는 장아찌의 맛, 장인의 정성과 고집이 바로 130년 전통의 맛이다.
이용숙
니혼슈 기키사케시(사케 소믈리에)
㈜린카이 이용숙 대표는 오랫동안 사케 소믈리에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간사이국제대학 경영학과 교수 및 니혼슈 홍보 한국사무국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 시장의 사케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사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밤’을 매년 개최, 사케에 대한 정보 공유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