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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8 (목)

칼럼

[이동화의 Special Tour] 북한관광_ 1부. 역사


남북한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다만, 관광산업에 국한해서는 북한관광에 대해 투자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북한은 가능성이 큰 투자처로 인식되는 한편,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즉, 하이리스크 하이리턴(High Risk, High Return.)이다. 문제는, 투자론에서는 이득이나 손실 모두 리턴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북한관광의 리스크를 감내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득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북한관광은 북한의 폐쇄적인 사회 개방에 기여함으로써 정치적 측면에서 남북한의 긴장을 완화시킬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를 쌓을 수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외자유치를 확대함으로써 경제난을 해소할 수 있으며, 사회·문화적으로도 남북한의 문화 관광자원의 교류가 가능해지기 때문에 체제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을 줄이는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북한의 지금까지 행보는 쉽게 신뢰할 수 없는 국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대규모 투자나 경제협력, 공동개발 등의 키워드에 선뜻 동조하기 어려운 이유다.  


북한관광은 통치자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여 왔다. 해방 직후 김일성 시대에 구성된 ‘8·15 경축관광단’을 최초로 보는데, 이는 북한정권의 수립과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시행된 것이었다. 이들 관광단의 목적은 남한과 비교해서 북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김일성은 관광단이 북한 체제에 감화돼 친북 인력으로 거듭나기를 원했다. 6·25 이후 북한 내부에서 시행됐던 관광은 국가건설을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53년 조선국제여행사가 설립됐는데, 이 당시 시행됐던 관광의 목표는 황해도 지역의 노동자에게 평양시와 주요 공장기업의 참관을 통해 전후복구사업의 경험을 전수하는 것에 있었다. 이후 관광단의 규모나 범위가 확대됐으나 기본적으로 공장이나 교육현장을 방문해 경험적 교류를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해외관광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소련·루마니아·몽골·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 모델 견학을 목적으로 행해졌다. 즉 김일성 시대에는 관광을 산업적 측면에서 본 것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따른 정책적 추진의 일환으로 육성했던 것이다. 이후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에는 내부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관광이 수행됐다. 즉 김정일을 신격화하고 정통 후계자로서의 김정일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한 스토리텔링 기반의 관광지로 계획적 관광이 실시됐다.  

 

관광을 산업으로 인식한 것은 김정일 정권부터였다. 1986년 북한에 관광총국이 설립되고, 이듬해인 1987년 7월에는 세계관광기구(World Tourism Organization, UNWTO) 제7차 총회에서 정식회원국의 자격을 득하면서 북한 내부적으로도 관광개발을 국가 중점사업으로 포함하기 시작했다. 김정일 정권에서는 중국과 관광협력을 확대하고, 내부적으로도 관광특구를 제정하며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남북관광협력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는데, 김정일은 故정주영 회장과 1989년 ‘금강산 및 시베리아 공동개발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하며 남북관광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처럼, 남북관광의 역사에는 현대家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故 정주영 회장은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소 판돈 70원을 들고 가출해 현대그룹을 일궜다. 정주영 회장은 남북이 분단된 뒤에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해 자신의 아호(我號)를, 고향의 이름을 따 아산(峨山)으로 짓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대한 속죄의 마음을 담아 서산 간척지에 국내 최대의 농장을 건설, 소 2700마리를 키우기도 했다고 한다. 훗날 남북 경제협력 사업을 전문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기업명 역시 현대아산(現代峨山)이었던 것을 보면 당 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실향민의 아픔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남북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사무치게 느꼈던 기업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리의 소가 천 마리가 돼 고향산천을 방문한다.’ 지난 1998년, 민간인의 신분으로 남북한의 군사경계선을 최초로 통과했던 83세의 정주영 회장이 남긴 말이다. 1차로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는 장면은 국내외의 각종 미디어나 매체를 통해 소개됐다. 남북한의 휴전선이 처음으로 열린 역사적인 사건은 미국의 CNN을 통해 전 세계로 방영됐고, 해외의 주요 외신들도 이례적인 대형 이벤트에 대해 앞 다퉈 보도했다. 영국의 인디펜던트지(The Independent)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핑퐁 외교’가 있었다면 남한과 북한 사이엔 ‘황소 외교’가 있다.”라고 평가했으며 프랑스의 경제에세이스트이자 전 파리정치대학 교수였던 기 소르망(Guy Sorman)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축하와 환영, 찬사에 힘입어 정주영 회장은 1998년 말, 2차 소 북송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금강산관광 사업에 관한 합의서 및 부속합의서’를 체결하고 같은 해 11월 금강호를 출항시켰다. 1989년 협력의 단초가 됐던 의정서 서명 뒤 9년 만에 이뤄낸 성과이자, 남북한 관광의 시작이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은 정주영 회장이 타계한 후에도 발전을 거듭했는데, 해로(海路)만 허용되던 관광을 육로(陸路)로도 확대하고, 승용차 관광까지 허용되기도 했었다. 금강산 관광은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인해 사업이 중단되는 2008년 7월까지 누적 196만 여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 비극적인 사건 후에도 현정은 현대 회장은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북측과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난 2018년에는 금강산 현지에서 관광 20주년 행사를 기념하기도 했다. 현대그룹은 금강산 관광사업을 위해 누적 1조 원 가량을 투자했다. 현대 그룹의 투자는 단순한 투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선대 회장의 실향민으로서의 아픔이 발로였으며, 분단의 시간이 길어진 요즈음에는 느끼기 어려운 한민족이라는 휴머니티가 배경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속했던 것은 선대회장의 유지를 지키려는 창업자에 대한 그룹차원의 예우와 그룹총수 일가의 가족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정권이 바뀌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대그룹이 투자했던 관광시설은 북측에 몰수당하고 당초 약속했던 북한관광산업의 독점권 역시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등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이는 북한이 관광산업을 통해 주체적으로 외화를 획득하기 위한 활로로 활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즉 향후 대북제재가 완화돼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관광수입을 현대그룹과 나눠야하며, 금강산 이외 지역에 대한 개발 역시 남한의 자본에 의존하게 되는 구도가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속내야 어떻든 여러 매체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 김정은 정권은 대북제재를 돌파하고 외화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관광산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만은 자명하다.    

  

올해는 6·15 남북공동선언으로부터 20년이 되는 해다. 남북 공동선언문의 내용 중에는 남과 북이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해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념이나 구체적인 통일의 청사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경제부분에 대해서는 협력이 필요한 것을 원론적으로 합의했다는 뜻이다. 


최근 통일부에서는 대북제재 상황과 관련해 남북의 독자추진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올해의 계획으로는 이산가족 및 사회단체가 개성과 금강산을 방문하도록 추진하는 것이며, 제3국의 여행사를 통한 북한의 개별관광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이 있다. 금강산 관광의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북한관광은 정치적 협의를 통한 국가적 규모의 투자나 진행보다 민간의 힘이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개별관광은 대북제재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남북관광의 실행모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듯이, 북한관광이 시작되기 전에 선행돼야 할 요소들은 명백하다. 관광객의 안전 확보방안과 법적제재를 마련하는 것과 사업 참여자들이 감내해야할 손실발생 상황에 따른 보상체계, 제도적 지원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요즈음 TV를 보면 탈북민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유튜브에서도 북한을 직접 방문한 외국인들이 찍어 올린 영상이나 탈북민이 만든 콘텐츠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989년 방영을 시작한 ‘남북의 창’이 북한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채널이었던 것과 비교해서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세월의 변화처럼, 앞으로의 남북관광도 전에 없던 새로운 모습이 될 것이다. 


자료 출처

강채연(2019) 김정은 시대 관광산업의 국제화전략과 관광협력의 선택적 이중구조. 통일부.

중앙일보(2013.6.1.) [정주영이야기⑬]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 ‘소떼방북’


*다음 호에는 <북한관광 2부. 카지노>가 게재될 예정입니다.



이동화
경희대학교 호텔경영학과 겸임교수 / (사)복합리조트관광연구소 이사
rhied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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