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의 지난 컬럼들에서 우리는 마카다미아, 잣 그리고 브라질 너트의 역사적 유래에 대해 알아봤다. 세계의 디저트에 애용되 는 다양한 종류의 견과류 중 이번 컬럼에서는 피스타치오에 대 해 소개보고자 한다. 피스타치오는 전 세계 수많은 요리의 첨가물과 간식으로 과거 부터 사랑받는 견과류였다. 옻나무과에 속하는 피스타치오는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에 유래를 둔 작은 나무다. 지금의 이란 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고고학은 피스타 치오가 기원전 6750년경부터 이미 흔한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서는, 피스타치오 무역과 피 스타치오 소유권이 부와 높은 지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전 설에 따르면 피스타치오는 시바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 로, 그녀의 영토에서 생산하는 모든 피스타치오 수확물을 그녀 와 왕실을 위해 소비했다고 한다. 지금의 피스타치오는 청동기 시대 중앙아시아에서 재배됐고 가장 오래된 유물은 우즈베키 스탄에서 발견됐다.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Pliny the Elder)는 그의 책 ‘박물지(Natural History)’에서 피스타치오는 시 리아에서만 자라는 나무들 중 하나며 약 1세기 경에 로마의
앞선 칼럼에서 우리는 호두와 피칸 그리고 아몬드, 월넛 등 견과류 디저트 재료들의 역사적 유래에 대해 다뤄 본 바 있다. 이번 편에서도 우리는 끝이 없는 견과류의 세계를 여행해 보고자 한다. 견과류는 인류 역사 그 시작부터 인간 식습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가장 오래된 호두 관련 유적은 기원전 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라크에서 발견됐다. 이번 호에서는 너무나 맛나고 흥미로운 견과류들 중 마카다미아, 브라질 너트, 그리고 잣과 같은, 우리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다른 견과류에 대해 소개한다. 마카다미아 하와이에서 기원했다는 항간에 알려진 사실과는 다르게 마카다미아는 19세기부터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스랜드(Queensland) 지방의 토착식물이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이 견과류는 1857년 퀸스랜드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껍질을 까기 위해 바이스를 썼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지배적인 품종은 화와이에서 재배되며, 앞서 언급된나무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필자는 남아공에 거주할 때 이 나무를 심은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그토록 까기 힘들었던 견과류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마카다미아가 다른 견과류보다 훨씬 비쌀까? 55%의 마카다미아가 오스트
최근 실존하지 않는 ‘가상 브랜드(Virtual Brand)’들의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코로나19는 레스토랑, 호텔, 케이터링 기업, 심지어는 병원까지 막대한 잉여 주방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국가들에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저금리 환경과 글로벌 저축 과잉으로 매장 확장을 위한 레스토랑의 자금이 충분한 탓에 전체적으로 풀 서비스 레스토랑의 공급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탄생한 가상 브랜드의 전망을 살펴보려면 먼저 ‘가상 브랜드’의 개념을 명확히 짚고 넘어가볼 필요가 있다. 가상 브랜드는 쉽게 말해 배달 서비스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메뉴가 제한된 레스토랑 브랜드거나, 배달만을 위해 개발된 단일 메뉴 브랜드다. 우리가 흔히 레스토랑하면 떠오르는 단독 건물 매장이나 식사를 위한 물리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스마트폰과 고속 광대역의 개발이 없었으면 생기지 못했을 개념이다. 가장 대표적인 미국의 사례를 통해 더 자세히 접근해보자. 코로나19와 기존 레스토랑 과잉 경쟁의 구조로 프랜차이즈, 독립 브랜드 할 것 없이 많은 레스토랑이 가상 브랜드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지난 호에서 설탕의 역사적 유래와 중세 유럽사회로의 데뷔에 대해 다뤘다. 중세말기 설탕은 매우 고가의 질 좋은 향신료로 여겨졌다. 하지만 1500년대 즈음부터는 기술적 발전과 신대륙에서의 공급으로 인해 훨씬 더 저렴해지고 대규모로 거래될 수 있는 상품이 됐다. 사탕수수 압착기의 성능이 발전했고, 이는 사탕 수수에서 얻을 수 있는 즙의 양을 2배 가까이 증가시켰다. 설탕은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지방에서 처음으로 대량 정제를 위해 재배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재배자들은 동물과 물 심지어 바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제분소를 돌렸고 이는 대량 생산으로 이어졌다. 포르투갈의 페드로 카브랄은 우연히 브라질에 도착했고 이곳에 설탕 플랜테이션을 지었다. 이후 결국에는 브라질의 설탕 생산이 설탕산업을 지배하게 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탕수수가 아메리카 대륙 야생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1500년대 중반에 들어서 브라질 연안, 카리브해, 남미지방을 합쳐 5000개 이상의 제분소가 세워졌다. 3000개는 1550년 이전에, 다른 2000개는 브라질, 데메라라, 수리남 북부 연안에 세워졌다. 초기 정착민들은 사탕수수를 심고, 수확하고, 정제하는 매우 힘든 과정을 소화할 수 있
디저트 재료들에 대한 연재를 이어가면서, 금월에는 음식문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소중한 식재료 중 하나인 설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필자가 설탕을 좋아하는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탕을 좋아한다. 물론 설탕을 누구나 모두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인의 식단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 중 하나다. 원래 인간의 생리는 소량의 설탕이나 정제된 탄수화물은 거의 필요가 없게 진화했다. 사실, 설탕 자체도 우연하게 우리의 식단에 등장하게 됐다. 가끔식 종종 인간들도 사탕수수의 줄기를 먹는 경우는 있었지만, 사탕수수는 원래 돼지들을 살찌우기 위한 사료작물 정도였다. 설탕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우리가 인지해야 되는 것은 설탕은 단순히 ‘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세기 동안 설탕은 약, 향신료, 왕권의 상징, 병의 원인, 중독, 억압의 상징 등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했다. 설탕이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꿀’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얼음이나 빙하로 덮여 있지 않는 육지 어디에나 꿀과 꿀이 있었다. 선사시대에 사탕수수를 씹는 일도 있었겠지만, 사탕수수의 경작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기원전 8000년 뉴기니의 원주민들에 의해서라고 알
커피는 전설에 따르면 6세기경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방목하던 산양이 날 뛰고 밤새 잠들지 못한 원인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커피 열매의 진실이 밝혀졌다고 전해진다. 그 후 13세기경에 아라비아에서 음료로 널리 보급됐고, 1605년 로마 교황 크레멘트 8세는 기독교인에게 커피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를 뒤로하고 1652년에는 런던에 커피숍이 3000개에 이르며 현재 전 세계인들이 즐기는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았다. 세계인의 음료가 된 커피는 크게 3가지 도구로 만들어지는데 첫째. 커피를 볶는 과정을 하는 로스터(Roaster), 둘째. 원두를 분쇄하는 분쇄기(Grinder), 셋째. 커피를 추출하는 추출기(Extractor)로 나눌 수 있다. 사진 제공_ 한국조리박물관 우리나라 커피의 시초 우리나라에서는 1800년대 후반 서양요리와 함께 커피가 도입됐다.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서 있었던 3개월 동안 양식을 처음 접하게 됐고, 궁으로 돌아간 후에도 양식을 러시아 공관에서 시켜먹다가 손탁(Sontag) 여사를 알게 된다. 손탁 여사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으로 1886년에 경복궁 양식 조리사로 임명돼 양과자와 양식을 만들어 고종에게 제공했다. 이에 고종이 덕
본 글은 음식문화와 함께 발전해 온 주방도구를 소재로 유래와 용도 그리고 이에 얽힌 사연들에 대해 기술한 필자의 저서 <주방도구의 비밀(2020), 형설출판사>를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12월호에 기재된 첫 번째 이야기, 오븐(Oven)에 이어 두 번째 이야기로 조리사의 분신(分身)과도 같은 ‘칼(Knife)’에 대해 정리하려고 한다. 조리사의 분신과도 같은 칼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데 있어서 식재료를 다듬고, 다지고, 자르는 용도로 쓰이는 칼은 조리사에게 있어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원시 농경문화시대에 얇은 돌의 양면을 갈아 사용된 석도(石刀)는 그 후 주조(鑄造)기술의 발달로 청동이나 철을 이용해 만들어졌고, 1900년대에 들어 스테인리스강(Stainless Steel)의 발명으로 식칼을 제조해 사용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전통 칼 우리나라에서 칼은 본디 ‘갈다’라는 의미의 ‘갈’에서 기인했다. 한국의 전통 칼은 현대식 칼과는 달리 검고 투박한 특징을 나타낸다. 어찌 보면 화공약품처리를 하여 매끈한 외관의 현대식 칼보다는 단조기술로 오랜 시간 두드려 만드는 과정이 조리사의 인생을 닮아 정감이 간다. 국가별로 식문화가 다른 관계로
서천에서 고기를 찾지 못했다. 서천에서의 영감을 요리로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바다의 보물들이 많은 그곳은 나를 매혹시키기엔 충분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코스에 육고기로 만든 스테이크가 있어야 만족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했다.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아무리 찾아봐도 그곳엔 없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원물의 성질을 바꿔놓을 순 없는 것.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대안은 서해안에 한우가 유명한 곳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서산, 홍성 중 홍성의 한우를 선택했다. 이로써 메뉴 구상은 끝이 났고 순조롭게 1주일간의 테스트에 몰입할 수 있었다. Amuse 쁘띠 마량포구, 블랙 쉬림프와 전어초밥 Petit Maryangpogu,Black Shrimp and Gizzard Shad Sushi 서천 중 가장 많이 방문한 마량포구를 표현하고 싶었다. 마량포구 앞에서 방파제를 보고 있노라면 수많은 배와 생선을 실어 나르는 차들로 붐빈다. 테트라포드에 부딪히는 파도와 그물로 마량포구를 표현했다. 대하를 껍질을 벗긴 뒤 내장을 제거한 후 오징어 먹물과 튀김가루를 섞고 160도에서 천천히 튀긴 다음 기름을 190도로 올려 한 번 더 튀겨내 여분의 수분을 날려 바
피자의 기원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는가? 피자는 이탈리아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피자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됐고, 미국은 그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피자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탈리아의 나폴리가 그린 포트 시티로 설립된 후, 피자는 이탈리아에서 더욱 발전했다. 처음 피자는 기름과 허브가 들어간 빵이었다. 모짜렐라와 토마토가 첨가된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피자는 18세기 후반에 대중화됐는데 그 당시에는 길거리 음식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자 왕과 왕비는 나폴리를 방문했고, 그들은 그곳에서 여러 종류의 피자를 시도해봤지만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부드러운 하얀 치즈, 빨간 토마토, 그리고 초록색 바질이 들어간 피자였다. 이것은 마치 이탈리아 국기의 색깔이기도 하다. 그 특별한 토핑 조합은 마가리타 여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 당시 이탈리아에서 피자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피자는 여전히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많은 유럽인들처럼 이탈리아 사람들도 미국에 일자리를 구하러 왔다. 그들은 그들의 요리 문
코로나19! 그 속에 내 꿈은 어디서 잠들고 있는가? 여러분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나? 이 질문들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우리에게 시간은 똑같이 주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어떤 사람은 성장하고 어떤 사람을 주저앉아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세상은 움직이고 있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 이렇게 한걸음 옮겨보자. 꿈을 날짜와 함께 적어 놓으면 그것은 목표가 되고, 목표를 잘게 나누면 계획이 되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꿈은 실현된다. 얼마 전 서점가 베스트셀러 중 백만장자의 마인드에 관한 책이 있었다. 그 책의 요점은 “백만장자 중 명문대 출신이나 최우수 졸업생은 거의 없다. 이들 중 61%는 일체의 유산을 상속받은 바 없다. 지능지수는 법대를 나올 만큼의 수준이 되지 못하고 학업성적도 대부분 평균이거나 그 이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떼돈을 벌겠다고 기를 쓰거나 피땀을 흘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Mind)부터 뜯어 고쳐야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백만장자 마인드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간과하는 경제적 기회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필요하면 신념을 가지고 경
서천의 발견 2016년으로 기억한다. 새로운 식재료의 탐구가 한창일 때 봄 제철 식재료를 찾는 중 산채나물과 잘 맞는 자연산 대형 도미와 넙치가 필요했다. 모르면 물어보라 했던가? 한국에서 요리를 한 적이 없고 오랜 떠돌이 생활에 딱히 선후배 없이 홀로 다닌 시절이라 당연히 인터넷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마량포구라는 곳을 찾았는데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서해안은 어종이 풍부하고 뻘이 있어 어패류와 해조류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마량포구는 인구가 얼마 안되는 아주 작은 항구지만 봄에는 자연산 넙치와 참돔, 여름에는 농어 등 어마어마한 대어가 잡히는 곳이다. 리서치팀과 서해대교를 건너 한산면과 특화시장 및 소곡주와 모시떡, 모시를 경험했다. 모시는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특산물이지만 직접 가보고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량포구로 가는 입구는 광활한 뻘로 펼쳐져 있었고 검은 얼굴로 우리를 반겼다. 도착한 그곳은 작은 어촌마을로 우리나라에 교회가 처음 들어온 곳이라고 해서 배로 만든 기념비가 있었고 그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마량포구에서 반겨준 씨푸드월드의 신경식 대표는 마량포구의 구석구석과 홍원항까지 가이드를 해주며
지난 수십 년간 바비큐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다. HPBA(Hearth, Patio & Barbecue Association)와 시장정보기관 민텔(Mintell)에 따르면 미국인들 중 30%가 그릴이나 훈연장치를 1개 이상 소유하고 있으며, 12%는 3개 이상의 그릴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미국 전역의 거의 모든 바에서 스모크 칵테일을 대접하고, 그릴 디저트가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이 조사결과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의 바비큐 문화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집에서든 바비큐 모임에서든 고급 레스토랑에서든 더 많이 굽고, 더 맛있게 굽고 훈연 향을 풍성하게 피웠다. 그리고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길러졌는지, 그리고 그것을 요리하는 가장 친환경적인 방법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와 관련한 지속가능성은 주요 관심사가 됐고,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요리, 해산물을 수확하고 굽는 새로운 방법들로 이어졌다. 그릴 제조업체들은 새로운 고성능 그릴과 스모커로 매출을 계속해서 올리고 있다. 앞으로의 바비큐 트렌드 예측 고기 없는 고기(임파서블 버거)10년 전이라면 고기 없는 버거는 불가능하다고 사람들은 웃었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