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 중에 미국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면 ‘마르디 그라(Mardi Gras)’에 대해 친숙할 것이다. ‘마르디 그라’는 ‘카니발(Carnival)’이라는 단어와 혼용되는 경우가 많다. ‘카니발’과 ‘마르디 그라’가 비슷한 단어임은 맞지만, ‘마르디 그라’는 정확히 말하면 예수 공현 축일의 만찬 전후에 시작해 재의 수요일(사순절의 첫날) 전날에 끝나는 축제를 의미한다. 이 기간은 부활절 전까지의 47일이다. ‘마르디 그라’에 대해 알고 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마르디 그라’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인 ‘킹 케이크(King Cake)’다.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가장 큰 파티인 만큼 ‘마르디 그라’에 맞는 케이크가 있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킹 케이크’는 그리스도를 상징화한 예수 공현의 재현으로 축제기간동안 먹는다. 다채롭고 계란형의 모양을 가진 ‘킹 케이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왕실문화에서 유래했고 오랜 전통을 담고 있다. ‘킹 케이크’는 브리오슈의 일종이다. 브리오슈는 계란과 버터가 많이 첨가되는 효모반죽을 말한다. 브리오슈는 종종 꽈배기모양을 가지고 있는 형태로 항상 원형이나 타원형을 띄는데 이는 왕족을 뜻하는 왕
피낭시에(Financier)는 필자가 여가시간에 커피 한 잔을 즐기기 위해 가장 많이 만들어서 먹는 정말로 사랑하는 디저트 중 하나다. 마들렌에 이어서 피낭시에는 예술과 문화의 나라 프랑스에서 두번째로 사랑받는 프티 푸르(Petit Fours, 커피나 차와 함께 먹는 케이크나 쿠키)일 것이다. 피낭시에는 아침이나 오후에 간식으로도 사랑받는 대중적인 길거리 음식이기도 하다. 피낭시에는 정확히 어떤 디저트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바삭한 가장자리를 가진 아몬드향의 쿠키다. 특유의 재료로는 뵈르 누아제트(Beurre Noisette, 갈색 버터)와 곱게 간 아몬드가 있다. 전통적인 피낭시에는 사각형모양이지만 오늘날에는 다양한 크기, 사이즈, 향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겉이 딱딱하면서도 바삭하고, 속이 촉촉하면서 아몬드향이 나야 제대로 만든 피낭시에라고 할 수 있다. 전통주의적인 필자는 아몬드향을 선호하지만 곱게 간 헤이즐넛이나 피스타치오도 쓰일 수 있다. 이 매력적인 케이크의 이름은 금괴를 닮은 외관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마들렌과는 달리, 피낭시에는 인기가 있는 디저트임에도 프랑스 문학이나 요리책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중세시대에 낭시와 로렌지방의 방문동정회
아마 마들렌은 우리 가슴과 삶 속에 자리 잡은 많은 프랑스의 물건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마들렌은 와인, 치즈, 바게트와 함께 프랑스 그 자체를 의미하는 디저트라 할 수 있으며 고급 베이커리에 가건 동네 빵집에 가건 한국의 그 어떤 제과점에 가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디저트다. 마들렌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간단히 마들렌을 정의하자면 계란, 밀가루, 설탕으로 만든 부드러운 작은 스폰지 케이크다. 가느다란 가장자리와 한쪽은 매끄럽고, 다른 한쪽은 울퉁불퉁한 특유의 조개껍데기 모양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주로 아침에 커피와 따뜻하게 데워서 먹거나, 영국에서 오후에 마시는 하이 티와 같은 ‘구티(Ggouter)’와 함께 오후에 먹기도 한다. 다른 특산물처럼 마들렌 역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작은 금빛의 케이크는 17세기부터 왕과 서민들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고, 1920년대 초기에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마르셀 프루스트에 의해 프랑스 문화의 일부로 영원히 남게 됐다. 마들렌은 막달라(Mary Magdalen,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제자)의 프랑스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코메르시 지방과 관련돼 있다.
파네토네(Panettone)에 대한 필자의 첫 번째 기억은 텍사스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매우 친한 이탈리아인 학교 친구가 옆집에 살고 있었다. 어느 크리스마스 날, 친구의 가족이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며 필자를 초대했고 함께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때 처음으로 여러가지 과일로 채워진 빵과 같은 이 디저트를 접했다. 필자가 이것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의 부모님이 파네토네와 함께 모스카토 스파클링 와인을 주셨는데, 그것이 필자의 알코올에 대한 첫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파네토네는 직역하면 ‘큰 빵 한 덩어리’라는 뜻이다.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파네토네는 밀라노지방에서 먹던 전형적인 케이크 형태의 빵이었고, 안에는 물기가 없는 말린 건포도, 설탕에 절인 시트론, 오렌지 껍질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건포도가 들어갔던 이유 중에 하나는 건포도 모양이 금화를 연상시켜 부, 행운, 소원성취 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파네토네는 상당히 풍부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다른 케이크나 디저트와는 다르게, 처음 탄생한 이래 수세기 동안 그 맛과 질감이 비슷하게 이어져왔다. 파네토네의 최초 개념은 꿀을 이용해 달콤하게 만든 빵이었다.
가을이 온 지금 필자의 머릿 속에는 온통 늙은 호박, 특히 펌킨파이(Pumpkin Pie)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원조의 맛과 미국식 분위기의 펌킨파이를 찾기란 쉽지 않아, 필자는 항상 서울 어디를 가던 펌킨파이를 열정적으로 찾는다. 실제로 몇 번 먹어본 적은 있으나, 제대로 된 펌킨파이는 없었다. 얼마전 C社에서 펌킨파이를 팔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비록 최고의 맛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한국에서 먹었던 것들 중 가장 정통 펌킨파이에 가까웠다. ‘펌킨(Pumpkin)’이라는 늙은 호박의 영문이름은 그리스어로 ‘거대한 멜론’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유래됐다. 펌킨파이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매우 대중적인 디저트다. 하지만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다. 펌킨파이는 미국 추수감사절에 특히 인기가 많은데, 추수감사절 식사문화의 아이콘이자 필수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은 호박은 기원전 5500년경 중앙아메리카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했고, 유럽의 탐험가들이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으로 들여온 첫 음식들 중 하나다. ‘박’이라는 식물이 유럽사에서 처음 언급된 것은 1536년인데, 얼마 안 돼 잉글랜드에서 꾸준히 재배되기 시작했다
파블로바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기억은 대학교 신입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도락가였던 친한 중국인 친구가 나에게 저녁을 대접했는데, 그녀가 디저트로 주문한 것이 파블로바였다. 아직까지도 나는 파블로바를 처음 입에 넣었을 때의 그 맛을 잊지 못한다. 파블로바의 가벼운 맛은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고 나는 마치 디저트의 신세계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거부할 수 없는 맛의 파블로바, 도대체 어떤 디저트일까? 사실 파블로바는 머랭, 신선한 휘핑크림 그리고 신선한 과일(주로 베리류가 들어간다)로 이뤄진 간단한 디저트다. 베리에서 나오는 산성이 짙은 맛과 크림, 머랭의 단맛이 대조를 보이며,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파블로바는 재료 면에서 머랭과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겉과 속이 모두 바삭한 머랭과 달리 바삭한 겉 부분과 부드러운 속을 가지고 있다. 파블로바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유명하고 대단한 디저트인 만큼,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동시에 파블로바를 그들의 국가적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두 나라 모두 유래와는 거리가 있는 국가들이다. 인접한 두 국가의 디저트를 둔 라이벌 관계와 상관없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모두 동의하는 사실은 이
치즈케이크는 비스킷 위에 크림과 신선한 치즈를 얹어서 만든 단 맛이 강한 타르트다. 필자의 어머니가 건강문제가 있음에도 거부하지 못하는 하나의 디저트가 바로 치즈케이크기도 하다. 엄밀히 케이크가 아님에도 케이크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에, 치즈케이크를 어떤 디저트류(예를 들어 커스터드 파이, 타르트, 플란 등)로 분류해야 하는지 논란이 많다. 이런 논란과는 상관없이, 치즈케이크는 다양한 맛을 구현해낼 수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디저트 중 하나다. 이 디저트의 긴 역사는 기원전부터 존재했다고 추정된다. 먼 옛날, 치즈케이크는 중세시대 영국에서 오직 부자들만 연회에서 먹는 고급 타르트였다. 하지만 치즈케이크 조리법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과 민주주의의 선구자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즈케이크의 발명에도 기여했다. 치즈케이크의 원형은 놀랍게도 그리스 요리다. 생각해보면, 그리스인들이 거의 모든 분야에 기여했다는 것이 참 놀랍다. ‘치즈케이크와 같은 것’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기원전 5년에 그리스의 뛰어난 내과의였던 아지무스(Aegimus)가 꿀로 치즈를 달게 만드는 과정을 담은 책에 나온다. 아지무스는 히포크
애플파이는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최고의 디저트다. 필자도 집에서 직접 애플파이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집안이 온통 싱그러운 시나몬 향과 사과 향으로 가득 차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전형적인 미국인’을 의미하는 ‘as American as apple pie(애플파이만큼 미국인스럽다)’라는 표현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만큼 미국과 애플파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애플파이가 미국에서 유래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의 아이콘과 같은 애플파이는 사실 1381년 영국 잉글랜드에서 처음 유래됐다. 영국인들은 그들이 미국을 식민지로 삼기 훨씬 이전부터 애플파이를 만들었다. 애플파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레시피는 ‘캔터베리 이야기’의 저자이자 영국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프리 초서에 의해 쓰였다. 초기의 애플파이는 사과, 무화과, 건포도, 샤프론, 배 그리고 페이스트리 껍질까지 존재했으나, 신기하게도 설탕은 넣지 않았다. 설탕이 초기의 레시피에 들어있지 않은 이유는 당시 설탕은 매우 귀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커핀(Coffyn, 영어로 관을 뜻하는 coffin과 발음이 유사함)이라고 불리는 입맛이 뚝 떨어질 것 같은 이름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스트룹와플이 한 유명한 커피 프랜차이즈 사에 의해 한국에 소개됐을 때, 굉장히 기뻤던 기억이 있다. 이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자주 가는 사람이면 대충이나마 오늘 소개하는 디저트가 무엇인지 감이 왔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스트룹와플에 대해 더 전문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스트룹와플은 튤립, 풍차, 나막신등과 함께 네덜란드의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은 디저트다. 길거리음식에서 시작한 스트룹와플은 얇고 평평한 2개의 와플 사이에 달콤한 시럽을 넣어서 샌드위치처럼 돼있다. 얇고 과자처럼 매우 바삭하기 때문에 튀겨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트룹와플 역시 와플기계를 통해 만든다. 스트룹와플은 결국 한마디로 일종의 쿠키 샌드위치인 것이다. 정확한 명칭은 아니지만, 스트룹와플은 한국에서 ‘캐러맬 와플’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대다수의 요리가 그렇지만, 스트룹와플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와플이라는 장르의 디저트 자체가 상당히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와플의 역사는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록에 따르면 7세기부터 이미 와플은 유럽 각지에 퍼져 있었으며, 13세기에 이르러서는 네덜란드에 ‘길드(Guild)’라고 불리는 기능인
‘파스텔 드 나타’는 에그 타르트로 알려진 포르투갈 크림 페이스트리를 뜻하는 포르투갈어다. 파스텔 드 나타는 포르투갈의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디저트다. 바삭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을 가진 페이스트리와 크림의 넘치지 않는 단맛 때문에 파스텔 드 나타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파스텔 드 나타는 현재 여러 가지 종류와 맛이 있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시나몬가루를 뿌려서 따뜻하게 나오는 가장 클래식한 맛을 좋아한다. 시나몬 가루가 아닌 넛맥 가루가 뿌려져서 나오는 것도 있지만 이는 영국식이다. 이 맛있는 페이스트리 디저트는 18세기, 리스본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산타마리아 드 벨렘이라는 지역구의 헤로니모스 수도원(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수녀원의 수녀들은 계란 흰자를 통해 그녀들의 린넨 옷에 풀을 먹이곤 했다. 속설에 따르면, 수녀원에서는 남은 노른자를 이용해 케이크나 페이스트리를 만들곤 했는데, 이 과정에서 파스텔 드 나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수사, 수녀들의 대다수가 프랑스에서 공부했던 만큼 프랑스에서 제과기술을 배워 와서 만들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1820년 포르투갈에 자유주의 혁명의 바람이 불면서, 왕정
블랙 포리스트 케이크(Black Forest Gateau)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이 케이크를 너무나도 좋아했던 필자는 어머니가 케이크를 사주는 생일만을 기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에는 그 케이크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체리와 초콜릿의 조합이 선사하는 그 맛은 아직까지도 감동으로 가슴 한 켠에 생생히 살아있다. 유년시절의 필자처럼 많은 이들이 케이크의 이름과 종류를 모를 뿐, 이미 우리들은 블랙 포리스트 케이크와 꽤 친숙하다. 이 케이크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체리가 들어갔는데, 전편에서 다뤘던 카늘레와 함께 가장 사랑하는 디저트 중 하나다. 블랙 포리스트 케이크는 초콜릿 스폰지 케이크, 체리, 생크림으로 구성된 4개의 레이어에 초콜릿 부스러기 그리고 장식용 체리를 얹어서 먹는다. 가장 밑단의 스폰지케이크에는 킬슈왓세루(Kirschwasser) 라고 불리는 체리브랜디를 칠하는데, 이를 통해 케이크의 촉촉함과 풍미를 더해준다. 블랙 포리스트 케이크는 많은 신맛의 체리들 중에서 어두운 붉은 색을 띄는 버찌 체리를 사용한다. 타르트 체리라고 불리는 이런 신맛의 체리가 쓰이는 이유는 타르트 체리들이 일반적인 단맛의 체리보다 제
카늘레는 필자가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 중 하나다. 카늘레는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유래된 티 케이크의 일종인데, 보르도 지방의 특산품으로,시간을 가리지 않고 커피나 와인에 곁들여 먹는 간식이다. 카늘레는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겉과 속이 각자 다른 맛을 자랑하는데, 겉은 캐러멜화 돼서 바삭바삭하고 얇은 반면, 속은 깊고 씹는 맛이 있는 촉촉한 커스터드가 일품이다. 카늘레가 처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부 전문가에 따르면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인 보르도에서 계란의 흰자를 와인통을 밀봉하는 데 사용했는데, 남은 노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요리를 찾던 중 우연히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카늘레가 가론 강유역의 적하장 인근 주민들이 쏟아져버린 밀가루를 이용해 아이들에게 디저트를 만들어주는 과정에서 생겼다고 한다. 이중 가장 유력한 설은 1520년 세워진 ‘안농시아드 수녀원(Couvent Des Annonciades)’의 수녀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는 것. 카늘레라는 단어는 보르도 지방과 프랑스 남서부지방에서 19세기까지 쓰이던 가스콩어에서 비롯됐다. 제빵장인들은 카늘리에(Canaulier)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1663년 보르도 지방의회
1000만㎡가 넘는 광활한 영토, 공식적으로 집계된 인구만 13억 명이 넘는 거대한 국가, 중국. 압도적인 규모만큼이나 식문화 역시 지역별로 각양각색이다. 이처럼 서로 특징이 다른 대표적인 중국 8대 요리를 소개한다. 지난 호에 이어 연재되는 중국 Part 2를 통해 다채로운 중국 지역 요리를 만나보자. 다채로운 사천요리의 매력 중국 여덟 지역의 요리 중에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바로 사천요리다. 사천요리는 청두지역과 충칭지역의 요리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사천성의 성도인 청두는 청두요리의 맛과 요리법으로 2011년 유네스코에 의해 ‘미식의 도시’로 선정된 바 있다. 사천요리는 30가지가 넘는 요리법이 수 세기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사천요리의 가장 큰 특징은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요리법과 산초가루, 후추, 고춧가루 이른바 3대 향신료가 많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사천요리가 유독 조미료를 많이 쓰고 매운 이유는 지형에 따라 온도차가 심한 기후 때문도 있지만, 놀랍게도 덥고 습한 날씨로 인해 생기는 음식의 부패 때문이라고 한다. 산초가루나 후추의 향이 부패로 인한 악취를 잡아준다는 것이다. 선뜻 이해가 안가는 이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 이유는 샬
중국은 1000만㎡가 넘는 광활한 영토, 공식적으로 집계된 인구만 13억 명이 넘는 국가다. 땅이 넓은 만큼 중국은 다양한 풍토와 지형을 가지고 있다. 황허문명을 꽃피운 중국 동부는 평지와 저지대로 이뤄진 반면, 서부는 빽빽한 고산 지대로 이뤄져 있다. 또한, 하와이를 연상케 하는 하이난 같은 열대기후지방부터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하얼빈 같은 냉대 기후지방까지 한 국가 안에 다양한 기후환경 역시 존재한다. 중국은 이렇듯 다양한 환경만큼 다양한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배경으로 진보해온 중국요리 문화 중국의 음식문화는 여러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해 진보해왔다. 이러한 요인 중에 하나가 부족한 식량문제다. 중국은 언뜻 보면 광활한 토지와 자원을 가진 풍족한 국가로 보이지만, 중국 역사 내내 이 엄청난 자원은 빠른 속도로 증가해온 중국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항상 부족했다. 그렇기에 중국의 음식문화는 한정된 자원으로 넘쳐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여러 식재료 중에서 육류는 가장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는 재료였다. 그 결과, 지금의 중국요리는 고기를 적게 사용하고 대신, 상대적으로 생산량이 많은 쌀이나 밀을 이용한 밥과 면류로 채우는 형태
스페인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국가로 미국 텍사스 주 정도의 크기이며,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국토 내 산지비율이 높은 국가다. 국토는 1833년 이사벨 2세 여왕 즉위 이래 5개의 지방, 17개의 자치지역으로 나눠졌다. 포르투갈과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는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의 약 85%를 차지하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는 지리적으로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유럽과 맞닿아 있고 동쪽으로는 지중해를 서쪽으로는 대서양을 끼고 있다. 이런 엄청난 지리적 조건 때문인지 스페인요리문화의 해산물을 바탕으로 하고 문화적으로 봤을 때는 지중해성 음식문화에 해당된다. 스페인은 내륙 계곡지역의 비옥한 농토에서 다양한 식물들을 재배되며, 특유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포도와 올리브를 생산하기에 최적의 날씨를 갖추고 있다. 또한, 내륙 고원지역과 산간지역은 목축업의 성지다. 다사다난했던 스페인 역사 지중해지역과 대서양을 이어주는 관문과도 같은 위치에 자리한 스페인은 역사 내내 전쟁과 분쟁에 시달려 왔다. 스페인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3만 2000년 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 가장 먼저 정착한 민족은 남쪽의 이베리아족, 북쪽의 켈트족 등이었다. 이후,
일본은 4개의 큰 섬과 대략 3000개가 넘는 부속도시로 이루어진 열도다. 국토의 ⅔은 개발이 힘들만큼 험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 농토의 절반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주식인 쌀농사에 이용되고 있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동식물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단 한 번도 국가적인 식량난을 겪은 적이 없었다. 어류자원이 풍부한 일본 고대 일본 야먀토 시대의 기록물들을 보면, 일본은 20가지가 넘는 토종식물과 120가지가 넘는 육류와 생선요리가 기록돼 있을 정도로 엄청난 동식물자원과 오래된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일본은 섬나라인 만큼 풍부한 어류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4대 어장 중 한 곳인 서태평양 어장, 대한해협어장, 센다이 어장, 동해 등 일본 전체가 비옥한 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세계 어획량의 8%를 담당하고 있고, 1인당 연간 어류 소비량이 70kg이 넘어갈 만큼 어류를 많이 소비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일본의 식량관련 상황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일본은 90%의 식량자원을 해외에서 수입하며 세계에서 손꼽는 수입국이 됐다. 일본의 이이토코토리 정신으로 해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