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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el & Resort

[Creative Hotel] 한국 호텔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과거로 떠난 시간여행,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모든 역사에는 시작점이 있듯 우리나라 호텔 또한 최초의 역사가 자리한다. 1880년대, 한국 역사의 격변기 시절로 돌아가 서양식 고급 여관을 뜻하는 호텔의 시초가 어디였는지, ‘최초’라는 단어에 적합한 어떤 호텔들이 생기기 시작했는지 타입슬립을 떠나보자. 1991년 창립한 호텔앤레스토랑에서 90년대 이후의 호텔 역사는 언제든지 살펴볼 수 있지만 그 이전의 호텔 이야기는 아직까지 많이 다뤄지지 않았다. 국내 호텔의 역사가 흑백영화처럼 흐릿하게 역사적 고증이 많이 남아 있진 않지만 그 당시의 호텔 사진과 기록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뿌리에 접근해보길 바란다.



1889

우리나라 호텔의 효시, 대불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 대부분 중심지인 서울에서 먼저 생겼을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1883년 한국을 방문하는 각국의 외교사절단과 외국 방문객들이 인천항으로 몰려들었기에 인천에서 먼저 호텔이 탄생했다. 물론 한국을 방문하는 이들의 목적지는 서울이었지만 그 당시는 철도가 놓이기 전이었기에 국내 방문객들이 인천에서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길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 통감부문서들을 살펴보면 대불(大佛)호텔을 다녀간 외국인들의 동정을 살핀 일본인들의 보고내용이 수록돼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서양의 여러 국가들과 강제적인 국교를 맺었고 그들과의 교류에 있어서 새로운 호텔의 도입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양 문물이 일찍 들어온 대불호텔은 국내 최초로 커피를 팔았던 호텔이기도 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인천항의 대표적인 숙박기관으로 한국에 머무는 외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889년(고종 26년) 건립된 대불호텔은 3층 벽돌집으로 중앙부에 페디먼트(Pediment)를 둔 서구식 호텔이었다.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가 인천 중구 중앙동에 호텔을 개관했으며 서양식 침실과 식당이 갖춰져 있었다. 침대 객실 11개, 다다미 방 240개에 달했으며 객실 비용은 당시 물가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대불호텔은 경인선 철도가 개동(1899년)되면서 수요가 점차 줄기 시작했고 1918년 중국인에게 팔려 1978년 철거되기까지 중국집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의 대불호텔 모습을 문화콘텐츠닷컴에서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볼 수 있다. 현재 옛 대불호텔 터를 오래된 흑백사진 2장을 근거로 25억 89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당시 모습을 재현했는데 1층 바닥을 투명한 유리로 장식해 문화재로 남아 있는 지하 구조물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의 근대 건축물을 재현하기보다는 현대식 철골 콘크리트로 지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1901

프랑스인이 운영한 서울 유일의 호텔, 팔레호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서울에 호텔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땅한 시설이 없었다. 근대 개화기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가장 손꼽힌 불편 사항이 바로 ‘숙박시설’이라고 뽑혔으며 유럽의 어느 가이드북은 여행 안내서에 ‘게스트 하우스, 미국공사관’을 기재해 그나마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숙박시설로 기록했을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식 숙박시설인 팔레호텔(Hotel du palais)이 1901년 대한문 앞에 생겼다. 궁궐인 경운궁의 턱밑에 자리한 팔레호텔은 개업 시기가 손탁호텔보다 앞섰다. 프랑스인 에밀 마르텔(Emile martel)의 <조선외교비화>를 살펴보면 팔레호텔의 등장이 1899년이라 증언하는데 역사적 고증에 있어서 그의 기억이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1904년 8월 4일에 게재된 <대한매일신보>에서는 팔레호텔을 서울 유일의 일등호텔이라고 명시했으며 숙련된 프랑스 요리사,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홍보했다. 그러나 팔레호텔을 다녀간 외국인들의 역사적 고증을 확인해보면 팔레호텔의 객실에 목욕시설이 구비돼 있지 않아 장기 투숙객들에게 적합하지 못했다고 한다.

초창기 팔레호텔의 주인이었던 마르텡은 1905년 팔레호텔의 화재를 계기로 이를 정리한 다음 프랑스인 보에르에게 양도했고, 보에르는 이후 손탁호텔 또한 넘겨받아 운영하게 된다. 팔레호텔의 이름이 프랑스식이고 호텔 주인들 또한 프랑스인들이었으며 주로 유럽인들의 고증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유럽인들이 자주 다녀갔을 가능성이 높다. 팔레호텔은 1912년 이후 일제에 의해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철거했을 것이라 추정하는데 생긴지 불과 10여 년도 채 되지 않아 사라지게 됐다.




1902

고종과 명성황후가 사랑한 호텔, 손탁호텔

개화기에 조선 정부는 많은 변화를 보였고 그 중심에 서있던 호텔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독일 여성인 손탁孫鐸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정동 가옥 터에 손탁호텔을 지어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으로 활용했고 명성왕후의 신임을 얻어 정계 배우로 활약했으며 손탁호텔을 서양 외교사절들의 사교장으로 사용했다.

손탁호텔은 커피 애호가였던 고종의 사랑을 받은 커피하우스로 유명했던 호텔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방 5개로 호텔을 운영하던 손탁은 점차 외교관들이 방문이 빈번해지자 고종의 도움을 받아 1902년 10월에 2층으로 된 서양식 벽돌 건물로 증축했다. 러시아 건축설계사 사바찐이 설계한 손탁호텔은 벽면 전체를 아케이드로 처리했으며 25개의 객실을 갖췄고 1층은 일반 객실, 식당 커피숍, 2층은 귀빈실로 사용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인 민영환, 이완용, 윤치호 등의 ‘정동구락부(서울에서 조직된 구미인들의 사교 친목단체)’ 회합 장소로 쓰인 손텍호텔은 이후 영국 수상 처칠, <톰 소여의 모험> 집필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 미국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다녀가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주력한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이 호텔에 투숙해 조선의 대신들을 초청해 회유하고 협박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이 아픈 상처를 입었던 일제강점기에 가장 번성기를 누렸던 손탁호텔은 1916년 이후 이화학당의 기숙사로 사용되다, 그 자리에 건축된 프라이홀 또한 철거된 후 현재는 그 터에 이화여자고등학교 주차장이 위치하고 있다. 한때는 국내외 귀빈들이 왕실 연회를 주관했던 럭셔리한 호텔이었던 손탁호텔은 역사가 바뀌자 옛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1914

한국 최초의 5성급 호텔, 조선호텔
조선총독부와 경성역의 중간지점에 위치했던 조선호텔은 1914년 9월에 완공했으며 대불호텔, 손탁호텔 다음으로 우리나라에 세 번째로 생긴 호텔이다. 그 시절 580여 평의 대지 위에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 최신식 건축으로 지어진 대규모의 호텔이었기에 한국 최초의 5성급 호텔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선호텔을 정부 직영 호텔로 운영해 서울을 대표하는 호텔로서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신세계그룹 계열사로 신세계조선호텔(웨스틴조선호텔)로 그 명성을 이어가는 중이다.
올해 개관 103주년을 기념하는 조선호텔은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라란데가 설계를 맡아 외관은 독일식, 내부는 프랑스식으로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조선호텔의 특실 중 201호실은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묵었던 방으로 유명하다. 김구 선생이 한동안 이 특실에서 머물렀으며 독립신문을 창간했던 서재필 박사 또한 다녀갔던 공간이다. 1953년에는 마릴린 먼로, 밥 호프 등 헐리우드 스타들이 조선호텔에서 위문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1967년), 조선호텔을 세계적인 수준의 호텔로 만들고자 옛 건물을 리모델링했는데 이 때문에 과거의 모습을 현재 호텔에서 찾아보긴 힘들다. 신세계조선호텔은 그 당시를 재현해내고자 지난 10월 대한제국 120주년과 조선호텔 개관 103주년을 기념해 ‘대한제국 황실 서양식 연회음식 재현행사’를 진행, 꾸준히 문화재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1938

가장 높은 건물에 위치했던, 반도호텔
노구치 시타가후가 1938년 지은 반도호텔은 조선호텔 바로 뒤에 세워졌으며 지상 8층 규모로 조선호텔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경을 자랑했다. 반도호텔을 짓게 된 일화가 상당히 독특하다. 대부호 건설업자였던 노구치는 조선호텔을 허름한 차림으로 방문하려다 문전박대를 당했고 자신을 무시한 조선호텔을 보란 듯이 그 뒤편에 반도호텔을 보다 더 웅장하고 높게 건축했다. 4층의 조선호텔보다 2배 높은 건물의 6층부터 8층까지를 호텔로 사용했으며 모두 111개의 객실로 꾸며졌다.
미군 사령부의 지휘본부로 활용된 반도호텔을 미 군정 장교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미 군정기 자료 주한미군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미군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반도호텔은 군사기밀을 위해 한동안 한국인들의 방문을 금지했을 정도다. 이승만 정권기에는 ‘호텔정치’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주요한 정치인들이 특급호텔에서 자주 만남을 가졌고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는데 특히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이 이러한 역할을 맡았다.
당시 정부가 관리하던 반도호텔을 1973년에 롯데호텔이 인수했으며 반도호텔의 역사를 지금의 롯데호텔이 이어나가고 있다. 정부의 주도하에 운영됐던 호텔을 민간 기업인 롯데가 운영하기 시작했고 개관한 이후 가장 많은 객실을 보유한 호텔로 등극했다. 1974년 철거작업 이후 반도호텔이라는 명칭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국내에 손꼽히는 호텔 중 하나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1955

현 엠버서더 호텔의 시작점, 금수장호텔
1955년 개업한 금수장호텔은 현 앰배서더 호텔 그룹의 시작점이다. 금수장호텔을 설립한 서현주 회장은 전쟁의 아픔이 가시지 않은 그 당시 미군들과 외교관들의 방문이 빈번하자 호텔 수요가 활발해질 것이라 판단해 국내 최초로 민영 호텔을 지어 호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이후 1965년 금수장호텔이라는 이름을 앰배서더로 바꾸고 1987년 2대 경영자인 서정호 회장에 의해 후반 프랑스 계열 호텔 체인 그룹인 아코르와 파트너십을 맺어 글로벌화를 이룬다. 풀만, 노보텔, 이비스, 머큐어 등의 호텔 브랜드를 국내에 도입하고 한국 호텔 시장을 한층 성장시켰다. 1976년에는 각종 연회, 세미나를 유치할 수 있는 그랜드 볼룸을 웨딩홀로 활용해 호텔 웨딩식을 국내에서는 선두로 진행했다.

또한 이를 발판으로 호텔 뷔페 레스토랑을 처음으로 개장했다. 금수장호텔의 역사를 담아낸 앰배서더 박물관 의종관은 2015년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오픈했으며 서현주 회장이 실제 생활했던 저택을 개조한 건물이다. 총 7개의 테마관으로 구성해 앰배서더의 시대별 호텔 모습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전시관에는 당시 사용했던 유니폼과, 레스토랑 기물, 메뉴판 등을 재현해 잊힌 그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1957

3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전통의 사보이호텔
1930년대 ‘조선의 주식왕’으로 명성을 떨쳤던 사보이호텔의 설립자 조준호 대표는 당시 정치 격변기 속에서 가장 영향을 덜 받는 사업이 무얼까 고민하다 호텔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가 영국 유학시절 경험했던 영국 호텔들을 모티브로 1957년 명동에 사보이호텔을 지었으며 순수 민간자본으로 만들어진 호텔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명동은 근대 신문물을 접할 수 있는 상업지역으로 급부상했고 이 무렵부터 대형 고층 건물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근처에 대형 백화점들 또한 우후죽순 생겨나 영업을 시작했다. 사보이호텔은 명동의 거리 변화에 영향을 줬으며 가장 번화가였던 명동 중앙로 주변에 위치해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가는 거리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러다 ‘정치깡패’들이 활개를 치던 1975년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인 ‘사보이호텔 기습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폭력배들 사이에 명동의 패권을 거머쥐고자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사보이호텔이 항간에 이목을 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의 본거지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사보이호텔은 오랜 역사를 지닌 호텔이니만큼 여전히 그 당시의 단골 고객들이 지금도 애정을 가지며 찾아온다. 연중 200일 이상을 투숙하는 장기고객도, 10년 이상의 장기근속 직원들도 많다. 이곳의 신현숙 회장은 국내 여성 첫 호텔 경영인으로 그 공을 인정받아 지난 10월 열린 ‘제44회 관광의 날’에 은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지난 60년 동안 3대째 이어온 사보이호텔은 앞으로도 그 전통을 고수하며 세대를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을 본지를 통해 밝힌 바 있다.



1971

설립 초기부터 젊은층의 사랑받은 로얄호텔
명동성당 입구에 자리한 로얄호텔은 1966년 설립된 대한 관광개발에 의해 1971년 개관했다. 기존의 호텔들이 외교관, 정치인 중요 인사관리들을 타깃으로 선점했다면 로얄호텔은 젊은이들의 요충지인 명동에서 주로 젊은 층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1층의 커피숍이 최고의 맞선 명당으로 소문이 나면서 주말이면 맞선을 보러 나온 선남선녀들로 문전성시를 이뤘고, 이들을 소개해주러 나온 중매쟁이들 또한 로얄호텔을 자주 오고 가는 손님들이었다. 또한 21층에 나이트클럽을 영업해 최고급 음향시설과 무대 장비를 갖춰 최신 유행하는 대중음악들을 만나볼 수 있는 젊은 층들의 장으로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당시에는 남한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남한 문화체험의 일환으로 로얄호텔 나이트클럽을 방문하기도 했다. 서양식 건물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공간이었던 호텔의 이미지를 로얄호텔은 외국 방식의 호텔 경영을 따르기보다는 한국 문화에 어울리는 호텔로 만들고자 했다. 총지배인을 한국인으로 등용하고 직원들 또한 한국인들로 뽑아 직접 현장에서 업무수행, 서비스 방식을 가르쳤다. 현재도 로얄호텔은 그 당시 호텔경영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명동의 중심지에 위치해 이제는 창립 40주년의 발자취를 자긍심으로 삼아 국내 브랜드 호텔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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